2015. 8. 20.

2010년대 중간결산 - 기억에 남는 미개봉작 25편 (1)

이 곳에 안착한 2010년부터 작년까지 지난 5년간의 연말결산은 모두 그 해에 극장개봉한 외국영화만을 대상으로 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나는 적어도 아직은 극장개봉 여부가 영화라는 매체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믿기 때문이고, 대한민국에 살며 영화를 소비하는 나에게 영화의 연도를 나누는 가장 직관적이고 간편하며 보편타당한 기준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붕 뜨는 영화들이 생긴다. 영화제, 기획전, 상영회 등에서 관람했거나, 드물게는 외국에서 보고 왔으나 개봉하지 않은 영화들이다. 비록 결산에는 포함하지 않으나 기록은 해 두고, 나중에 정식으로 개봉하게 되면 그 해에 뒤늦게 편입시키는 식으로 정리해 왔다.

작년 말에 2010년대 중간결산으로 가장 좋았던 영화 열 편을 정리하면서 참 좋아했는데 아직도 개봉하지 않은 영화들이 제법 많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정식 개봉의 기회를 앞으로도 잡지 못할 영화들이다. 어떤 식으로든 한 번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또 혹시나 다른 분들이 관심이 생길 수 있게 간단히 소개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 글에 걸쳐 2010년부터 2014년까지 관람한 미개봉작 중 기억에 남는 25편을 정리한다. 영화제를 통해 이 기간에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나 아직까지 개봉하지 않은 작품들이다. 느슨하게 좋았던 순서대로 나열했다. 대부분 관람한지 오랜 시간이 지난데다 이제 와서 다시 구해 보기가 만만하지는 않은 작품들이기에 흐릿한 기억과 느낌에 의존했다.


25. 사랑인 줄 알았어 (201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It Felt Like Love, Eliza Hittman
이 작품을 대단히 훌륭한 성장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소녀가 처한 상황은 한정적이며 이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다소 단조롭다. 하지만 그 한정적이고 단조로워 보이는 순간순간의 묘사들을 떼어놓고 보면 각각은 제법 흥미롭다. 성에 눈뜨고자 하는 소녀의 호기심, 무지함, 혼란스러움, 또래들과의 어색함 같은 것이 장면마다 잘 담겨 있으며, 때로는 그 생생한 서투름이 스크린 밖으로 또렷이 다가와 온 몸에 민망함이 밀려들기도 한다.


24.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회화 (2012년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Gerhard Richter - Painting, Corinna Belz
제목에 충실한 다큐멘터리. 영화는 상당수의 시간을 리히터가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할애한다. 화면에 담긴 창조의 과정은 반복되는 노동에 가깝다. 페인트를 섞고, 이를 거대한 캔버스에 반복적으로 칠한다. 리히터는 때때로 어떤 색을 어떤 방식으로 입힐 것인지 고민하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지금까지의 작업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바라보는 것 뿐이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완성된 그림을 감상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다.


23. 호수의 이방인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
Stranger by the Lake, Alain Guiraudie
단조로운 서사의 에로틱 스릴러. 남성을 향한 성적 욕망만큼이나 주인공을 이끄는 것은 위험과 불안의 세계로 자신을 내던지려는 어떤 힘이다. 그 자체로 굉장히 근사한 ‘게이 영화’이기도 한데, 노골적인 성묘사와 더불어 영화의 분위기와 구조, 그리고 영화가 담고 있는 시각 등 많은 면에 이른바 ‘게이스러움’이 훌륭하게 잘 담겨 있다.


22. 컴퓨터 체스 (201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Computer Chess, Andrew Bujalski
독특하고 예측불가능한 이야기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소재와 구성과 분위기가 주는 잔재미 또한 상당하다. 과거의 이야기를 과거의 장치와 과거의 기법으로 담았으나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때로는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다큐멘터리인 척을 하다 코미디를 거쳐 판타지가 되며 종종 종잡을 수 없는 방향을 틀지만, 인간을 담은 컴퓨터와 그 주변을 맴도는 인간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소재와 영화가 이를 들려주는 방식은 참 묘하게도 잘 어울린다.


21. 하와이 (2013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Hawaii, Marco Berger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이 두 남자에게는 정말이지 답답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 과정이 딱히 지루하지는 않다. 영화는 관계가 시작되기 전 단계에 있는 두 남자와 그 주변을 가까이서 탐구하는데 여기에는 관계가 시작될 수 있기는 한지를 가늠하는 지난한 탐색도 포함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많은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 시기에 벌어지는 수많은 사소한 사건과 심정의 변화가 섬세하게 잘 담겨 있다.

댓글 3개:

  1. 안녕하세요, 필름 크리틱 크리스틴 진님의 트위터 링크를 타고 들어온 사람입니다. 주인장님께서 이런 시리즈물을 연재하신다니 정말 기쁘네요. 저도 봤는데 주인장님 혹시 도 보셨는지요? (아 참 얼마전에 블로그 구경하다 독자 인터뷰를 봤는데 정말 재밌었습니다. 독자 인터뷰는 이제 끝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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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나머지 20편도 꼭 알고 싶네요 (20편 안 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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