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20.

감독과 배우가 살려낸 영화, 파이터

The Fighter (2010)
Dir: David O. Russell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파이터는 제 취향의 영화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호평 일색이었던 연기 때문에라도 보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록키를 연상시키는 너무나 뻔한 줄거리가 전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거든요. 파이터(마크 월버그)는 어수룩한데다 소심합니다. 한때 잘 나가던 형(크리스찬 베일)은 동생의 트레이너를 자처하지만 현실은 약물중독에 빠진 범죄자입니다. 주변에는 극성스러운 엄마(멜리사 리오)와 파이터를 구해내려는 여자친구(에이미 아담스)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상투적일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흥미진진합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배우들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연기입니다. 상투적인 캐릭터에 사실감을 불어넣어 줍니다. 면면이 화려한 출연진들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배우는 바로 크리스찬 베일입니다. 살인적인 체중 감량을 거친 약물중독자로의 변신은 그가 보여주는 연기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디키의 태생적인 활달함과 능청스러움 속에 감춰진 패배자의 괴로움과 자기연민이 살짝 엿보이는 순간, 배우는 사라지고 디키라는 나약한 캐릭터만이 스크린 너머로 전해져 옵니다. 아카데미는 이 연기에 남우조연상을 주었을지 몰라도, 크리스찬 베일은 영화 전체를 이끄는 명백한 공동주연입니다.

그 외에도 연기 변신에 제대로 성공한 에이미 아담스,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에너지를 끊임없이 발산하는 멜리사 리오, 어리버리하지만 중심을 잘 잡고 있는 마크 월버그 역시 제 몫을 충분히 해냅니다. 아버지 역의 잭 맥기나, 역동적인 일곱 자매들 등의 주변인물들 역시 웃음을 선사해 주며 이야기에 사실감을 더해 줍니다.

그리고 나머지 공로는 모두 감독 데이빗 오 러셀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진부한 스토리를 신선하게 만들어내는 놀라운 재주가 있습니다. 리듬감이 느껴지는 오프닝 장면, 실제 복싱 중계처럼 구성된 경기 화면, 영화 속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를 다루는 방식 등 다양한 측면에서 감독의 재치있는 선택이 영화 내내 빛을 발합니다. 결국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힘은 감독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고나 할까요. 가장 인상적인 건 배우들의 앙상블을 섬세하게 조율하며 세련되게 뽑아내는 능력입니다. 특히 감옥에서 나온 디키와 미키가 재회하는 장면에서는 수많은 등장인물의 절묘한 호흡이 감탄스러울 정도입니다.

디키가 샬린의 집 앞에 찾아가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둘의 만남은 디키가 연신 눌러대는 벨소리와 욕설을 쏟아내는 샬린의 목소리가 겹치며 만들어내는 독특한 템포로 시작됩니다. 평면적인 캐릭터였던 디키는 처음으로 절박한 내면을 드러내지만 그 순간에서조차 결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부심과 당당함만은 놓지 않습니다. 디키의 추궁 앞에서 샬린 역시 처음으로 나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를 통해 샬린과 미키의 진부한 로맨스에도 어느 정도 당위성이 부여됩니다.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던 두 사람이 날카롭게 대립하다가 결국은 공통점을 발견해내는 인상적인 순간입니다. 영화는 샬린이 문으로 걸어 내려오는 짧은 순간조차 결코 그냥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행인에게 애완견의 종을 묻는, 조금은 생뚱맞은 디키의 짧은 대사는 인물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냄과 동시에 이 영화가 얼마나 놀라운 생동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영화가 지니고 있는 분명한 한계와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이유가 빼곡히 들어찬 마법 같은 장면입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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