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 Exit Through the Gift Shop (뱅크시)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세계가 다큐멘터리로까지 확대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 실화는 거리미술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던 티에리가 뱅크시를 찾아나서면서 시작됩니다. 뱅크시의 예술을 논할 것만 같았던 초점은 어느새 티에리에게로 옮겨지고, 평범한 괴짜였던 티에리는 뱅크시의 영향으로 자기 자신도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합니다. '미스터 브레인워시'라는 아티스트로 변해 가는 티에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현대미술의 거대한 허상을 마주하게 되고요. 이 모든 과정을 감각적인 편집으로 이어 붙인 이 기묘한 다큐멘터리는, 뒤틀린 유머가 빛나는 한 편의 훌륭한 블랙 코미디 그 자체입니다.
문득 기억나는 영화 속 순간: 티에리의 카메라에 찍힌 제이 레노와 노엘 갤러거
9. 슬리핑 뷰티 Sleeping Beauty (줄리아 리)
극단적인 현대판 동화라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잔혹하고 처절하지만 한편으로는 섬세하고 아름답기도 합니다. 감독 줄리안 리는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차분히 묘사해 나가는 감각적인 방식을 택하고 있어요. 마치 수수께끼를 한 꺼풀씩 벗겨내며 풀어나가듯이 말입니다. 카메라는 너무나도 건조한 시선으로 아픈 곳을 쿡쿡 찔러대듯 주인공을 훔쳐봅니다. 에밀리 브라우닝은 단단한 방어기제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곧장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이 어린 소녀를 훌륭하게 연기했어요. 차가우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해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슬프지만 아름다웠던 영화였습니다.
문득 기억나는 영화 속 순간: 지폐 한 장을 집어들고 태우는 루시
8.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루퍼트 와이어트)
기술적으로 탁월하고 볼거리도 풍부한 2011년 최고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면, 우리 속에 갇혀 "No!"를 외치는 시저의 모습에서 이 정도의 전율이 느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기술의 힘을 빌린 연기를 통한 유인원들의 섬세한 감정 표현, 시저와 주변 캐릭터 사이의 대범하면서도 흥미로운 관계 묘사 덕분에 영화에 푹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스크린 속 개들의 활약이 대단했던 한 해였지만, 인간이 아닌 영화 속 캐릭터 중 제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건 바로 시저였어요.
문득 기억나는 영화 속 순간: "Caesar is home"
7. 블랙 스완 Black Swan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각적이고 직접적인 영화경험의 극치를 보여 주는 한 편의 아슬아슬한 스릴러입니다. 영화는 현실과 환상 사이, 그리고 백조와 흑조 사이에서 긴장감 넘치는 줄타기를 선보입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교묘하고 능수능란한 지휘는 진부한 것도 참신한 것처럼, 유치한 것도 고급스러운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묘한 힘을 발휘합니다. 물론 영화 속 심리 묘사를 섬세하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주제를 드러내는 데 노골적으로 이용하는 편에 가깝죠. 하지만 백조와 흑조를 넘나드는 나탈리 포트만의 '니나'는 바로 그 노골적인 그로테스크함 덕분에 영화 속 아이콘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거라고 생각해요.
문득 기억나는 영화 속 순간: 손톱 옆 살을 찢어내리는 니나
6. 세상의 모든 계절 Another Year (마이크 리)
해피 고 럭키에 이어, 감독 마이크 리의 행복에 대한 통찰력 있는 연구가 계속됩니다. 전작이 포피라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면, 이 영화에서는 톰/제리 부부와 메리를 함께 주목하며 행복 뿐만 아니라 그와 대비되는 외로움도 함께 들여다보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의 나열에 가까웠던 전작의 구조 역시 한 해 동안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계절의 변화에 따라 지켜보는 것으로 한층 풍성해졌어요. 물론 소소한 일상을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잔인하리만치 냉정하게 그려내는 예리한 묘사도 여전하고요.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문득 기억나는 영화 속 순간: 메리가 있는 걸 눈치채고 목도리로 목을 매는 시늉을 하는 케이티
5. 트리 오브 라이프 The Tree of Life (테렌스 맬릭)
한없이 우주적이면서도 한없이 개인적인 이야기가 잔잔한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이 영화가 관객을 가르치려 드는 영화라거나 철학적으로 깊은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대단히 직접적이고 시각적인 방법으로 생의 탄생과 사멸을 바라보고 있죠. 첫 문장에서 '우주적'이라고 한 것도 현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영화가 우주를 다루어서 그래요. 그 정도로 무궁무진하게 넓습니다. 넓다 보니 얕을 수밖에 없는 거고요. 그 깊이를 채우는 것은 관객의 몫일 겁니다. 하지만 굳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토록 시각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순수하게 아름다운 작품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어린 시절 우리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은 이 영화와 정말 닮지 않았던가요?
문득 기억나는 영화 속 순간: 다시 만나 서로를 어루만지는 잭과 오브라이언
4. 사랑을 카피하다 Certified Copy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이런 황홀한 미로라면 몇 번이고 빠져도 좋을 것 같아요. 두 남녀의 이야기 속에서 가짜와 진짜의 경계는 무너져내리지만, 그 덕분에 관객이라는 실제와 영화라는 허구 사이의 벽 역시 함께 허물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빨려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하루 동안 장소와 언어를 바꾸어 가며 미로 속을 함께 헤매는 둘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요. 지적인 대화에 머리 역시 덩달아 즐거워지고요. 가끔은 투박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영리하게 굴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진실하게 다가옵니다. 회의에 빠질 때에도 가슴따뜻함을 잃지 않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 주고요. 세 번을 보았지만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른, 참으로 독특한 경험을 선사하는 짜릿한 작품입니다.
문득 기억나는 영화 속 순간: 눈물 한 방울 뚝 떨어뜨리는 엘르
3. 세나: F1의 신화 Senna (애쉬프 카파디아)
F1과 친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도 이 영화를 아무런 무리 없이 즐길 수 있을 겁니다. 단지 세나라는 한 사람의 뜨겁고 순수한 열정의 대상이 레이싱이었을 뿐이거든요. 영화는 그의 드라마틱한 삶을 훌륭하게 녹여낸 한 편의 전기영화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힘만을 굳게 믿고 의지한 채 아무런 잔재주를 부리지 않겠다는 과감한 결단이 영화 내내 빛을 발합니다. 인터뷰 샷도, 화려한 사운드 보정도 없이 그저 방대한 자료만을 잘라붙여 만들어낸 영상의 몰입감은 엄청납니다. 단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선형적으로 담담히 이어질 뿐인데도 말이죠. 그러면서도 세나의 삶 속 다양한 측면을 고루 담아내며 그와 그 주변이 변화해 가는 모습을 쫓아가는 스토리텔링이 대단합니다. 그렇게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우직하게 앞만 보며 달려가던 영화는 순수한 마음으로 레이싱을 시작하던 때를 회상하는 세나의 인터뷰로 끝을 맺습니다.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는 듯한 이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은 불꽃 튀는 질주와도 같았던 세나의 삶과 겹쳐지며 묘한 울림을 만들어내요. 그 울림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겁니다.
문득 기억나는 영화 속 순간: 고국에서 열린 그랑프리를 우승한 뒤 울부짖는 세나
2. 비기너스 Beginners (마이크 밀스)
감독 마이크 밀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이 영화는 우울해 보이는 이야기를 위로의 메시지를 담아 따뜻하게 풀어냅니다. 영화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올리버의 현재 모습과 그의 과거를 함께 추억합니다. 75세의 나이에 자신이 게이임을 고백하며 비로소 진짜 모습으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당당하게 살아가던 아버지와, 상실감을 안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던 어머니의 모습을 번갈아 비추면서요. 감독은 각각의 조각들을 재기 넘치는 경쾌한 연출로 이어붙여 한 편의 훌륭한 콜라주를 만들어냅니다. 그 안에는 공동체에 대한 감사와 애정이 어려 있고,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도 담겨 있으며, 사랑과 치유에 대한 굳은 믿음도 들어 있어요. 덕분에 영화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상쾌한 예찬으로 다가옵니다.
문득 기억나는 영화 속 순간: 프러포즈의 순간을 이야기하는 할 그리고 그 장면에서 올리버의 리액션 샷
1.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A Separation (아스가르 파르하디)
영화는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와 이를 들어주지 않는 남편의 실랑이에서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맞물리며 탄탄한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중간중간 현대 이란을 살아가는 이들이 마주하는 문제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내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모습들은 그저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묘하게 친숙하고 설득력 있습니다. 배경은 다르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갈등과 이를 둘러싼 보편적인 물음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일 겁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복잡하게 꼬여 가는 이야기 속에서도 모든 인물을 섬세하게 보듬는 시선입니다. 그 때문에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것도, 영화가 던지는 질문들에 선뜻 답을 내어놓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탄성이 나올 정도로 완벽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까닭이겠죠.
문득 기억나는 영화 속 순간: 수갑 찬 손을 흔들며 딸에게 인사하는 나데르
다음 글에서는 좋았던 감독, 각본, 연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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